너는 기물로도 남지 않는다. 귀중품에 가까운 형태로 살아생전 미래를 기약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살아생전 살아생전 나는 살아생전이란 말을 전기와 연료가 드는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드러눕는 반려인 무엇이 되고 나서야 가장 소중하게 입에 담는다. 개자식, 개자식… 이방인을 본 개처럼 짖듯이. 금속판으로 못을 조이고 이어붙였을 목은 잘도 목소리를 낸다. 어떻게 녹...
에녹. 나는... 끊어지는 여자의 말에 눈이 뜨인다. 부드러운 잠옷 위로 새싹 무늬가 수놓아져 있다. 뻐근한 어깨를 꾹꾹 누르며 옆을 돌아본다. 제이드, 라는 이름은 그이의 눈을 부르는 거 같다. 녹색이 우거진 눈동자로 나를 담는 사람. 숲으로 들어가면 다시 똑같은 길로 나오지 않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신을 향해 계속 걸어오는 시선을 껴안는 눈꺼풀. 느...
여름장미 김연덕 던졌는데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공처럼 공의 공포처럼 잊히지 않는 밤이 있다 그것은 날이 밝으면 고개를 수그리고 물을 끓이고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창밖에 흐드러진 장미에 대해 말한다 어떤 죽음이 그렇듯 상담사가 그렇듯 그것은 주목받기도 주목받지 않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공이 있어 저마다의 여름밤 잃어버린 빛이...
겨울이라는, 빛의 의미가 성립되려면 질서가 극복되어야 하는 계절에 갇히는 운명에서 사는 종들이 있다. 사람은 대부분 시작보다 끝에 의미를 두고 산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지쳐 있다. 작가는 문장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종이를 모두 불을 지키는 데에 쏟아붓는다. 학생들은 이제 사는 법이 아니라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어느 해부턴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축하해야 ...
2075년의 선조들에게, 이게 잘 들린다면 좋겠네요. 저희가 지금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거든요. 링크구조를 달고 있는 달만한 로봇이 있어도 우리를 구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불가능한 일이니까. 지금 당신들도 상황이 심각하겠죠. 아시아에서 시작된 핵전쟁이 범세계적으로 퍼지고, 이제는 개나 소나 초능력을 쓰고. 이제는 태어나서부터 배우는 것도 이능력을 가지고 저...
봄을 맞이하기 전부터 봄을 맞이하는 날까지 지진이 일어나지 않아도 사람들이 흔들리는 기간이 있다 겨울이 내려오고 나면 봄을 몇 번이고 맞이했던 것들도 몇 번이나 피워냈던 색들을 선보일 수 없게 된다 집이 무너져서 맨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놀이라고는 없는 것 같았다 겨울은 아무 생각도 말아야 겨우 버텨낼 수 있는 힘겨운 시간이었다 눈꽃은 불꽃도 아닌데 어떻...
나는 생명체라서 모두가 나를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배웠다. 약하게 태어나서 약하게 죽는데 그 시간이 길기에 사람들에게는 따르기가 쉬우면서도 어려운 가르침이었다. 나는 다가가는 역할을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옮겼다. 피가 산책을 할 수 있는 부드러운 길에서 모두의 손발에 함부로 채여도 누군가의 눈에 걸리지 않는 것으로 옮겨졌다. 말을 듣지 않는 물건은 손으...
어느 때처럼 핸들을 잡는다 별 볼일 없는 하루의 양화 삼선 슬리퍼를 신은 발이 쓸려 올라간다 질질 아스팔트의 텍스처 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차선에서 왼쪽으로 이제는 양화에서 볼 수 없는 망아지가 지나가고 오른쪽에는 언젠가 나도 타게 될 수 있는 나는 모르는 차들이 지나간다 새치기 당하고 싶지 않던 내 자리가 좁아지면 경적은 경고를 하다가도 살아갔다는 까닭으...
가끔씩 위로 솟구치고, 아래로 치닫을 때가 있다. 그 폐곡선은 금방 잊게 될 노란색 선으로 내 눈앞의 장소나 내가 태어나 자라고 있는 장소를 에워쌌다. 오른쪽의 감각이 뭉특해져가는 엄마의 단발머리가 검붉게 염색이 된 채로 왼쪽 범퍼가 으스러진 차. 담배 연기로 가득한 시골의 아뜰리에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버지가 가실 때도 담배 냄새를 내시며 향 연기 사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유서를 써봤다. 지금은 그때 쓴 내용들이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한 것은 아이들 앞에서 내가 가장 펑펑 울었다는 거다. 지금 쓰기 시작하는데, 내가 이걸 다 쓰고 나서 한 번 돌아볼 때 그때처럼 울 수 있을까? 어제도 이유없이 모두가 싫어져서 눈가가 시큰했는데 울지를 못 해서 자기 전까지 시큰둥하게 눈초리...
2월 14일 출생. 감정을 글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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