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심연을 들여다 본다 심연을 들여다 본다 깊은 못의 가장자리를 잡아 벌리고 그 물의 끝자락을 들여다 본다 괴물과 투쟁 중인 나는 끝내 도망쳤다. 도망치다 눈에 보인 연못에는 괴물을 담는 물이 담겨...

유성우에 소원을 담아

몇 년, 몇 십년마다 회귀해서 귀소 본능에 따르는 듯이 우리 은하로부터 머나먼 성단에서 푸른 지구의 근처를 떠돌러 오는 호기심 많은 혜성들이 있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사그라드는 빛의 말단에서 이끌리듯 빠져나온 독특한 아이들, 처음 보는 바깥 세상에 매료되어 길을 잃은 젊은 푸른 별들 생명이 샘솟는 파아란 행성을 감싸는 두껍고 거센 바람의 껍데기는 그 미아...

Moonshine.

어둠은 무엇을 가리려고 태양을 잠시 끌어내리고 세상에 찾아오는 걸까 매일을 밤과 낮으로 함께 해서 하루 종일을 밤낮이라 말해도 밤은 여전히 친숙하지 못 하는 이방인 밤기운은 암막 커튼을 하늘에 친다 그 뒤로 별빛이 입자처럼 위치하고 햇빛의 잔해는 남아 어느 위성으로 향해 그 빛을 키워 밤하늘로 보낸다 달빛은 무엇을 드러내려고 12시간도 못 남아 있는 이 밤...

봄이 오면 눈이 나린 그 자리에서 별자리를 그리듯 거리를 두고 나뭇가지 위에 피어나는 새하얀 목련은 고귀한 흰 꽃잎을 활짝 펼쳐서 오늘날의 삭막한 세태의 매캐한 입김과 거센 바람을 환영하듯 맞이해주다 변색된다 겨울을 버티고 태어나서 봄에 성장하고 성숙되어서 숨을 쉬자마자 고된 추위를 견딘 강인함이 무색하게 인자하게 그를 감싸안는 나약함이란 약자의 상흔은 아...

누군가는 칭송한다 지금은 미숙할지라도 지금은 우둔할지라도 지금은 무지하고 무력할지라도 결국엔 꽃이 될 사람이라고 언젠가는 꽃이 될 것이라고 민들레씨처럼 날아온 막연한 기대를 가슴에 품어 본다 이럴 수 있는 젊음이란 꽃다운 것이라고 나는 꽃다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꽃답게 화사하게 피어나지는 못 했다 기쁨과 행복은 개화하지 못 하고 대신에 내 슬...

바닷가의 조개는 우리가 모르게 강하던 것이었다. 바다의 소금기를 머금은 갯벌의 진흙 속에서 두껍거나 얇고, 거칠거나 부드러운 껍질을 꽈악 닫고서 곱고 매끄러우며 반짝이는 진주의 연약하고도 아름다운 꽃 같은 그 삶을 거센 풍랑으로부터 지켰다. 조개 안에서 진주는 세상의 공세와 독기로부터 마음껏 벽을 두고 멀어진 채 안락을 누릴 수 있었다. 손바닥보다도 작았으...

'여우야, 여우야. 어디를 가느냐.'

여우비가 내리는 날이면 동네 촌락의 어리고 순수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형제들이 알려준 여우가 혼약을 맺어 가는 날에 대한 동요를 부른다. 여우야, 여우야. 어디를 가느냐. 여우야, 여우야. 아직 날은 맑은데. 여우야, 여우야. 제발 떠나지 말아주렴. 반딧불이 아직도 밝고 아직 세상은 따뜻한데. 무엇이 없어서 슬피 울며 우릴 떠나나, 여우야. 호랑아, 여우는 ...

많이 낡았구나. 이젠 내가 너의 드림캐처가 되어줄게.

크리스마스가 돌아온 듯, 세 명의 귀신과 함께 크람푸스가 내 입에 석탄을 물리며 조소하는 모습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화로 속 불꽃에 숯이 묻은 호접지몽은 사그라들었다, 어느새 아침 햇살이 부숴지며 창문으로 들어왔고, 살짝 열린 창의 새로 산들바람 봄바람이 불어와 드림캐쳐가 살랑살랑 깃을 흔들었다. 작은 새가 날아와 날갯죽지를 흔드는 거 같았다. 자그만 ...

버티지 못 하고 그는 인어가 되었다.

먼 고시(古時)에 어느 섬이 있었다. 그 섬은 하룻밤 사이에 바닷물에 잠겼다 하더란다. 그 섬은 입으로만 전해져 내려와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전설의 도시로 남았다. 아틀란티스는 과연 생명을 품지 않고 있을까. 푸른 바다 안에서 인류는 죽고 인어란 신인류가 피어난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문명을 이루어 우리들 몰래 살아가는 중이지 않을까...

코제트의 별명은 종달새였다.

"엄마, 아빠. 전 뭘 하면 될까요?" 작은 종달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부모가 누운 침대의 이불을 뒤흔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저리 안 가? 아침부터 말이야. 쪼그만 게." 종달새는 지저귀지 않으며 집안에 아침을 불러오지 않았다. 아침을 불러온 것은 바람에 흔들린 커튼의 물결이었다. 결핍된 소녀는 근면했으나 태만해진 꼴이 되었다. 금발은 햇살을 담...

애매하게 뿌려진 성수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바르면 애매하게 성인이 되고 모호한 성숙함을 얻어버린다. 성장을 제대로 하지 못 한 여린 아이는 자신에게 떨어진 성수 몇 방울에 도취되어 끓는 고양과 격양을 축복이라 혼동해 자신을 스스로 혼돈의 구렁텅이에 집어넣어 버리는 참사를 벌이게 된다. 햇빛에 녹아버릴 밀랍으로 엉성하게 조성한 날개를 달고 천사가...

프로메테우스가 처음 땅에 가지고 내려온 불을 보러 갔습니다. 춥고 어두워서 생명이 전부 잠들어 있던 밤의 서리를 녹여내고 땅에 초록색 싹이 트게 하덥니다. 그러나 생명이 싹을 트면, 그 동안 다른 사람도 흙에 숨을 묻히다 쏟아버리고는 합니다. 불이 있어도, 그 불이 서서히 사그라들면서 남기는 붉게 타오르는 보석이 불꽃 놀이를 하며 온기를 터트릴 수 있게 할...